여기는 왠지 평화롭다. 떠들썩해도 시끄럽진 않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썩 바빠 보이지 않는다. 골목길 작은 카페의 테라스 그늘에 앉아 한가로이 얼음을 녹여가며 커피를 즐길 넉넉한 시간이 있다. 테이크아웃 음료를 한 잔씩 손에 들고 걸어가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잔잔한 카페의 음악과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한 화음으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공연 시간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이들도 같이 온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에 지루해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카페거리는 많지만 이렇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곳이 또 있을까. 날씨 좋은 날이면 왠지 골목골목 숨어있는 작은 카페를 찾으러 가고 싶은 곳. 구불구불한 골목을 천천히 걷는 즐거움이 있는 곳. 조금 덥더라도 실내보다는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곳. 연극과 뮤지컬, 공개 코미디 공연으로 유명하지만 실은 다른 매력이 더 많은 곳. 대학로는 이런 곳이다.
 












어떤 문화, 어떤 예술, 어떤 거리
 
한동안 이 땅에도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같은 문화예술의 거리를 이룩하겠노라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 대학로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 결과로 마로니에 공원이 말끔한 대리석 바닥으로 리모델링 되었고 열악한 시설의 소극장 대신 좋은 시설을 갖춘 큰 극장들이 많이 생겼다. 그런데 재밌게도 문화와 예술의 거리를 만들겠다고 했던 많은 일들은 원래 대학로에 있던 문화와 예술을 변두리로 쫓아만 냈다. 1987년에 세워진 대학로소극장, 1993년 문을 연 학전그린소극장과 같은 유서 깊은 소극장들이 문을 닫았고 거리와 공원을 무대 삼아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대리석 바닥에선 자리를 찾지 못했다. 자신의 무대에서 밀려난 이들, 소극장과 대학로 큰길에서 밖으로 밖으로 밀려나던 이들을 이제는 무대가 아닌 브라운관에서 ‘소극장 집단 이주’라는 극단(劇團)적인 길을 찾고 있다는 뉴스로나 볼 수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이 원했던 문화와 예술 그리고 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쨌든 덕분에 좋은 극장이 많아지고 거리가 깔끔해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좋은 극장이 많아지고 그만큼 공연의 수도 늘어났지만, 왠지 볼만한 공연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채널이 300개가 넘는 케이블TV에서 볼만한 채널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외적으론 풍부해졌지만, 내적으로도 다양해졌는지는 의문이다. 다행히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대학로에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을 위한 무대는 몹시 좁고 멀고 잘 보이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의 새로운 모양새
 
문화예술의 거리로 유명한 대학로는 오랫동안 한국의 브로드웨이라 불리며 연극과 뮤지컬, 공개 공연의 산실로 역할 해왔다. 대학로가 없었다면 송강호, 황정민, 설경구 같은 이름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훌륭한 배우들과 그들의 무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수십 년간 객석에서 열광했고 응원했고 대신 감동을 얻어가곤 했다. 그러나 훌륭한 배우와 그들의 연기는 언제나 감동적이었지만 객석까지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훌륭한 공연을 보려면 몇 시간이고 좁은 자리에 빽빽이 무릎을 접고 앉아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셔야 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새로 생긴 극장에선 무릎을 당기지 않고도 편하게 앉을 수 있고 연신 눈에 들어가는 땀을 닦지 않아도 쾌적하게 연극을 볼 수 있다. 무대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지만 이런 안락한 변화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한 번 좋은 시설의 극장을 다녀오니 다시는 열악한 극장에 가고 싶지 않다. 뉴스에선 문을 닫는 소극장이 많고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고 나오지만, 한편에선 더 많은 극장이 새로 문을 열고 있다. 꾸준히 늘어난 소극장은 대학로 지역에만 160여 개가 되었다. 뉴스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얘기에 의아하다. 이를 두고 소극장의 난립이라 표현하는 이들도 있고 선정적인 작품으로 반짝 유명세를 얻거나 유명 작가와 배우를 섭외해 공연이 아닌 안전한 경영만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새롭게 지어진 극장에 다녀온 관객들이 다시 오래된 극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명하고 오래된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그네들과 공유하는 추억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발랄하게 표현하는 법
 
요즘 대학로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어디일까. 마로니에 공원? 쇳대 박물관? 모두 아니다. 요즘 대학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벙커원 카페(BUNKER1 CAFE)다. 매일 색다른 강연과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카페. 이곳에선 철학자, 영화감독, 심리치료전문의,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플로리스트, 격투가, 여행 PD 등 정말 다양한 인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을 나눠가며 카페 손님 혹은 청중과 함께 웃고 떠들며 강의라기보다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눈다. 팟캐스트 생방송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북 콘서트가 펼쳐지기도 하며 주말엔 교회로 변신해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올리기도 한다. 난잡하고 어지럽기 그지없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요즘 대학로에서 이보다 더 핫한 곳을 찾기도 어렵다. 항상 사람이 북적이고 종종 카페 주제에 자리가 모자라기도 한 이곳은 누군가 투자하고 이루어내고자 했던 문화와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인테리어가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고 좋은 길목에 위치해 나도 모르게 들리게 되는 곳도 아니다. 카페가 인기 있는 이유는 그 발랄함과 명랑함에서 찾아야 한다. ‘가카모카’가 무슨 말인지 아는가? ‘모카라떼’와 대통령을 우스꽝스럽게 부르는 칭호인 ‘가카’를 합쳐 만든 말이다. 이 우스운 단어가 벙커원 카페에선 정식 메뉴 이름이다. 어설프고 우스꽝스럽더라도 유머러스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카페의 정신이 바로 이 이상한 카페를 인기 있게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는 대학로에서도 데모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젊은이들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데모였다면 이곳에 모인 지금 젊은이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은 발랄한 유머러스함일 것이다. 어쩌면 격렬한 데모든 명랑한 풍자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대학로를 대학로답게 만드는 것, 대학로의 문화와 예술이란 ‘표현’ 그것이다. 재기발랄한 표현이 넘치는 벙커원 카페를 찾아 이 시대의 젊음을 느껴보자.
 














보이지 않는 승부수
 
발랄하고 명랑해진 요즘에도 대학로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라고 떠들썩해지기 전부터 대학로의 문화와 예술을 지켜온 이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이지만 제자리를 고수하는 이들이 있다. 학림다방은 3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여전히 그 시절의 LP판이다. 시대에 맞춰 메뉴도 바뀌고 찾는 손님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학림다방에선 지금의 젊은이들과 예전의 젊은이들이 함께 차를 마신다.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영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무엇이 변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학림다방은 적어도 아직은 옳은 선택을 해온 것 같다. 학림다방에 오늘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이 그 결과일 테니 말이다. 생긴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대학로에는 예전에나 볼 수 있었던 이음책방이란 작은 서점이 있다. 언젠가부터 대형 서점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동네 작은 책방들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여전히 나름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크고 화려하고 편리한 대형 서점만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불편할 수도 있는 작은 서점이지만 개성과 철학으로 독자를 모으고 있다. 아직 서점의 선택이 학림다방의 그것만큼 옳은지를 선뜻 판단하기는 이른 것 같다. 시간이 더 지나고 판단해야 하겠지만, 부디 좋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학림다방도 이음책방도 프랜차이즈 카페나 대형 서점에 비하면 다소 불편하고, 썩 좋은 점이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향수와 애정만으로는 불편함을 이길 수 없고 가치나 의미와 같은 보이지 않는 말은 가격을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은 그 매력을 발견하고 찾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쯤은 그 매력을 찾으러 학림다방과 이음책방이 있는 대학로를 찾아보자.
 












백열등과 형광등의 조화(調和)
 
대학로 바로 옆에 이제는 대학로보다 더 유명해진 이화마을이 있다. 세련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작고 오래된 주택들이 모인 이 마을은 원래 낙산공원 가는 길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한때는 재개발을 추진했으나 무산되는 등 부침을 겪었고 결국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았다. 이 조용한 마을이 이제는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유명관광지가 된 것은 몇몇 예술가들이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나서부터였다. 오래되고 남루한 벽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심심했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높은 계단과 언덕길을 지나야 찾을 수 있는 마을에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섰다. 관광객들은 노점상이 없어 걷기 좋은 거리, 크고 세련된 건물과 건물에 들어선 유명 커피숍, 문화예술의 거리 대학로보다 땀을 흘리며 한참을 걸어 올라야 있는 작은 마을과 그 마을의 허름한 벽에 그려진 벽화를 더 좋아했다. 작은 마을에 생긴 카페엔 사람들이 북적이고 저녁이면 일찌감치 문을 닫던 동네 슈퍼마켓은 조금 더 늦게까지 문을 열고 누런 백열등을 하얀 형광등으로 갈아 끼웠다. 마을이 변한 것은 예술가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마을이 예술가들의 그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덕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학로에 들어선 좋은 극장들과 유명 카페처럼 누군가 이화마을을 어떤 문화예술의 마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3~4년만 지나면 볼품없어지는 벽화를 늘 새롭게 유지해 생생한 마을을 만드는 일이 마을과 예술가들 공동의 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마을의 변화가 실은 신비한 조화(造化)가 아닌 모두의 조화(調和)에서 나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마을은 예술과 경영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하게도 평범한 거리
 
언제 가도 대학로는 참 평화롭다. 한때는 데모도 많이 하는 시끌벅적한 곳이었다지만 지금은 오히려 쉼표에 가까운 한산한 인상의 대학로. 대학로라는 장소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주 오래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본 대학로는 늘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홍대 앞이나 건대 앞의 소란스러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게는 대학로처럼 넉넉하고 여유로운 곳이 필요했다. 야한 옷을 입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는 게 편한 내게는 화려한 클럽보다 대학로의 평화롭고 수더분한 밤이 더 좋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도 왠지 피곤하지 않고 부대끼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대학로가 좋다. 골목골목 숨어있는 아기자기한 카페를 찾는 즐거움도 좋다. 커피를 마시러 가서는 카페보다 많은 옷가게 사이를 헤매는 것이 어려운 내겐 카페거리인지 쇼핑타운인지 알 수 없는 거리보다 대학로가 마음 편하다. 눈부시도록 광을 낸 번쩍이는 차를 보면 왠지 어색한 나는 적당히 묻은 먼지만큼이나 사람 손길이 묻은 차가 있는 대학로가 좋다. 청년과 중년이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거리,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이 같은 공원에 앉아있는 것이 당연한 거리, 나란히 서 있는 오래된 분식집과 세련된 카페가 조화로운 거리. 대학로가 좋은 것은 어쩌면 대학로가 특별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대학로에 가면 여유와 평화, 넉넉하고 잔잔한 조화가 있다.

취재 노일영
사진 여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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